2008년 8월 19일 화요일

대한쥬신제국기[17]

8부 약진(躍進)하는 쥬신 - 제1차 조일분쟁 [朝日紛爭, First Jyusinian-Japanese Dispute]

시간은 흐르고 흘러
9092년 7월경 (서기 1894년)


한경특별구역 외교관구 주일공사관

쥬신수도방위군에 포위당한 주일공사 하라모토 카스이에 (源本春家)는
쥬신이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공사님! 본국에서 전갈입니다!"

공사관 직원이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왔다.

"뭔가? 설마 그..."
"예! 그 설마입니다. 나가사키에서 대규모 함대가 소주로 출격했다고 합니다!"
"맙소사, 놈들눈에는 내가 안보이나! 난 지금 저 쥬신인들한테 총에 맞아 죽을 처지라고!
쥬신은 위험하다고 괜한 도발 하지말랬더니 공사로 내쫓고,

나보고 앉아서 죽으라는거야! 이 나쁜 정부자식들!"

"공사님! 수상기(TV)에서 속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JBN 긴급 속보입니다. 일본군이 항주만의 쥬신군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 지금 일본 정부에서 긴급 발표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이성구 특파원 나와주십시오!
'예, 지금 여기는 도쿄 가스미가세키 정부종합청사입니다.

현재 일본 수상이 대쥬신담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 시작되었군요.]

-안녕하십니까, 일본국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우선 현재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일전, 쥬신제국육군 1200여명이 항주에 상륙하려는것을

중화민국 정부의 요청으로 우리 일본군이 저지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제공격은 쥬신측에서 먼저 했으며, 일본군은 대응공격으로 모두를 사살하였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으며, 교전 과정중 우리 일본측도 수십명의 군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쥬신은 주권국가에 자신들의 군을 상륙시키려 하였으며, 이는 엄연한 불법입니다.
우리 일본은! 굴하지 않고 쥬신의 동아시아 정복을 저지하겠습니다.-"

야마모토 공사는 말도안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천하의 거짓말쟁이는 다르군...'

"이봐, 지금 JBN이랑 대한일보, 쥬신신문을 포함한 모든 언론사의 기자들을 불러주게.

나도 입장발표를 해야겠어."
"하, 하지만 공사님! 그런짓을 하셨다간 본국으로 강제압송 당할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죽는건 마찬가지야."

"[JBN 긴급 속보입니다. 일본공사가 현재 입장발표를 준비중이라고합니다.

현장에 정정민기자, 나와주세요!"
'예, 저는 지금 일본공사관앞입니다. 지금 일본공사가 입장발표를 준비하고있는데요,

어?! 저쪽에서 뭔가 다가옵니다?
육군장갑차군요. 아, 저건... '여러분의, 대한의 육군입니다! 모든 국민들은 빨리 대피하십시오!
본 건물안에 폭발물이 설치되어있다는 제보입니다!
' 포...폭발물?! 저, 저는 일단 여기서 대피하겠습니다! 카메라 빨리꺼!'
-쿠웅...쿵...쾅...치이이이이이이익-"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킨 이후 근대화를 이루며,

제국주의적 대외진출을 도모하였다.
4200년에는 쥬신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화친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두고 조·일 양국간의 분쟁은 계속 발생하였다.
쥬신은 4207년 쓰시마인(對馬人)이 일본인에 의해 살상된 것을 계기로,
대마도에 출병하여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쥬신의 세력권하에 두게 되었다.
그 후 4212년에는 종래 조·일 양국이 종주권을 주장해 오던 대마도를 병합하여
대마군(對馬郡)을 설치하였고, 일본의 용인을 받아냈다.

보다 큰 분쟁은 중화민국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세력 다툼이었다.
일본은 유신 직후 쥬신의 간섭을 배제한 채 중화와 수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4209년),

상하이·항저우·광저우를 개항시켰다.
한편, 쥬신은 일본의 중화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중화로 하여금 서양 각국과도 조약을 맺도록 조언하였다.
중화에서 4215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출병하여 적극적인 개입으로 중화에서 보다 확실한 주도권을 잡았고,
4217년에도 중화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은 진보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쥬신 군사는 이를 3일만에 진압하였다.
두 사건에서 쥬신이 우세하고 일본이 약세를 보이자,
일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하였다.
다음 해 조·일 양국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여,
양국 군대의 철수를 약속하고 이후 중화에 출병할 때는 상호 통고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쥬신과 일본의 군대는 중화으로부터 철수하였으나,
쥬신은 원세정을 중화에 주한대사로 상주시키고 중화의 내치·외교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도 쥬신의 진출이 크게 향상되는 등, 쥬신은 중화에서의 패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도 경공업 등이 발달하여 중화 시장에 크게 진출하게 되어,

중화는 조·일의 경제대립의 장이 되었다.
그러던차 4227년 중화에서 농민반란(農民反亂)이 발생하였다.
위기에 처한 중화 정부는 쥬신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양력 6월에 쥬신이 파병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동시에 중화에 파병함으로써 세력 만회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일본은 철병(撤兵)을 거부하고
오히려 중화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어, 중화내 개혁(갑오개혁)을 강요하고,
동시에 중·조간에 맺은 통상무역장정(通商貿易章程)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며

내정을 간섭하는 등 지배권 확보를 도모하였다.

일본은 개광(개봉-광주)간 전선(電線)을 가설하여 전쟁에 대비하는 듯 하더니,
6월 21일에는 병력을 동원하여 총리관저와 4대문을 장악하였다.
한편, 중화 정부는 일본의 강요로 쥬신과의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조-중간의 국교를 단절시키고, 일본군은 중화 정부의 요청을 받은 것처럼 위장하여
항주만에 주둔중인 쥬신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항주만 앞바다에서는 쥬신의 육군을 싣고 오는 쥬신의 함정을

일본군이 습격하여 참패시키고 말았다. 여기서 쥬신의 군사 1,200여명이 익사하였다.
이미 조·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내에서 충돌한 것이다(4227. 7. 25, 새벽).
이어서 소주(蘇州)에서도 두 나라 군대가 충돌하여 일본군이 압승하였다.
이 마당에 양국은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고 이제야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8. 1).

그 후 회남 전투에서 역전이 시작되어 쥬신이 승리하였으며

양자강 중류에서 벌어진 도하전에서도 일본군이 패주하였으며,
쥬신은 호북성 무한을 일본군으로부터 탈환하였다.
쥬신 해군은 우세한 전력으로 연승하며 일본본토에 상륙하였다.
규슈의 구마모토까지 점령한 후,
최후로 시코쿠 연합함대를 격파하여, 결국 서일본함대(西日本艦隊)는 전멸하고 말았다.
일본 세이니혼제독(西日本提督) 마치미즈 히로고(丁水日五)는 항복문서와 함께

모든 군사물자를 쥬신에 양도하고 자결하였다.
쥬신군은 이세반도·이세만·하마마쓰를 장악하고, 도쿄·시즈오카를 위협하였다.
북쪽에서는 센다이를 점령하고, 끝내는 열도 전체를 정복할 기세였다.

이럴 즈음 영국과 러시아 등이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쥬신은 이들을 모두 거절하고,
국제적으로 중립적으로 보이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결국 쥬신과 일본은 4228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당시는 馬關)을 체결하여

전쟁의 뒤처리를 하였다.
쥬신은 승전 댓가로 거액(일본 1년 예산의 2.5배)의 배상금과
일본의 영토인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 훗카이도[北海島], 사도섬을 할양받았다.
그러나 극동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러시아는

쥬신이 후쥬신 북부의 영토를 장악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이에 간섭하여(삼국간섭) 후쥬신 북부를 러시아에 반환토록 압박하였다.
힘의 열세를 느낀 쥬신은 후쥬신 북부를 반환하였고,

러시아에 대한 불만은 심화되어 새로운 어두운 역사를 잉태하고 있었다.

전쟁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쥬신은 벼락치기로 전쟁준비를 해서

준비가 덜 되어있던 일본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조일전쟁의 승리로, 그 동안의 동양 패권을 쥬신이 더욱 확고히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몽골 등 대륙으로의 진출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쥬신은 국내의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패전한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더욱 받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4341년(서기 2008년) 작성된 한경대학교 한 학생의 출제물



9095년(서기 1897년), 쥬신내에서 국명에 대한 이의제기가 시작되었다.

국명변경론자의 의견은 '쥬신과 후쥬신이란 용어는 어디서 유래되었나'이다.
후쥬신인들은 고서인 '환단고기'가 그 유래라며 국명변경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정밀조사끝에 환단고기가 위서로 판정나자,
정부에서는 위서에서 따온 이름은 쓸수없다하여 새로이 국명을 정하기로했다.
주로 "대한제국", "조선제국", 혹은"대한조선제국"으로 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대한제국"쪽으로 가닥이 잡혀갔다.
환단고기에서 유래된 "한기(桓紀)" 또한 바꾸기로 하고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도 건국연대가 오래되었다는것을 알리기위해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원전 2333년설을 이용해 단기를 제정했다.
(예는 서기 1897+기원전 2333을 더해서 단기를 구한다. 이때는 단기 4230년이다.)


1897년, 정부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통칭은 한국)하고
화폐단위개혁을 통해 100환을 1원(圓)으로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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